가짜를 해설합니다

내 목소리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높은 음역이나 극적인 떨림이 없다. 감정을 과시하기보다 절제된 톤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사람들은 그런 내 목소리를 오래된 나무 악기의 울림에 비유했지만, 나는 그 소리로 역사의 마디를 조용히 새길 뿐이다.

10년 넘게 부마항쟁의 현장을 해설하며 다져진 그 목소리는 어느덧 직업적 자산이 되어있었다. 나는 시월 기념사업회의 해설사 양성 과정에서 1기로 이 길을 시작했다. 내게 해설이란 흩어진 증언과 기록의 조각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 그날의 시간을 오늘로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 일은 깊은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나를 채웠다.

그 자부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건, 탐방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저녁이었다.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대고 습관처럼 이메일을 열어보던 중, 낯선 이름의 메일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해설사님께, 지난주 탐방에 참여했던 대학생입니다.’

호기심에 메일을 열어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해설사님. 새벽벌 회관 옆 김장수 기자 표석에 새긴 대운동장 사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해설사님께서는 그 사진이 부마항쟁 당시의 기록이라고 하셨지만, 제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그 사진은 가짜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월재단에서도 몇 년 전 이 사진을 ‘잘못 알려진 사진’으로 공지한 바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 하단에는 시월재단 웹사이트의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링크를 클릭하자, 화면에 뜬 것은 ‘잘못 알려진 사진’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게시물이었다. 문제의 대운동장 장면을 포함한 여섯 장의 사진 아래로, 나는 숨을 죽이고 스크롤을 내렸다. 거기엔 변명처럼,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진은 1980년대 혹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의 기록임.'

해명도, 사과도 없었다. 그저 아무도 보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작은 글씨 몇 줄. 나의 자부심이라는 성(城)이, 그 작은 글씨 몇 줄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학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10년간 부마항쟁의 출발점이라며 설명했던 저 사진은, 전혀 다른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가짜였다.

부마항쟁 관련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재단 설립 초기에 한 이사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했으나 “별일 아니다”며 묵살당했다고 했다. 그러다 몇 년 뒤, 조용히 소식지 구석에 이 기사가 실렸다.

“대체 어떻게 이걸 몰랐던 걸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시월재단은 단 한마디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의 방관 속에서 가짜 사진은 여전히 진짜인 양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기념사업의 권위, 예산의 장벽, 그리고 김장수라는 거장의 이름값이 얽힌 침묵의 장막 아래, 진실은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그 거짓을 가장 열정적으로 전파한 확성기였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자랑했던 완벽한 해설, 나의 자부심은 모두 거짓 위에 쌓은 모래성에 불과했다.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을 떠올렸다. 부마항쟁 관련자 모임 대표인 박동욱 회장이 어느 모임에서 씁쓸하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였다.

그날, 박동욱 회장은 모교에서 열리는 토크쇼에 참석하기 위해 교정을 걷고 있었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 온화한 미소를 가진 원로였지만, 대학에만 들어오면 그는 언제나 40여 년 전의 청년으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그의 걸음마다 격동의 시대가 너울거렸다. 그러다 행사장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토크쇼 홍보 패널에 박힌 자신의 얼굴 때문이었다. 김장수 기자가 찍었다는, 40여 년 전 P 교도소 문을 나서는 자신의 사진. 하지만 그 사진 속 인물은 그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악의가 그의 눈과 입을 뒤틀어, 희극 배우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놓았다.

숨이 멎는 듯했다. 저항에 몸을 던진 청년 시절, 신념을 위해 견뎌낸 고통의 시간이 한 장의 사진으로 조롱당하고 있었다. 분노보다 깊은 모멸감이 먼저 밀려왔다. 그는 즉시 대학 홍보실 책임자에게 전화했다. 행사장 근처에서 달려온 책임자는 그의 격앙된 항의에도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했다.

“선생님, 저희는 기록관에서 받은 원본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문제없다고 확인받았어요.”

“문제없다니! 내가 저렇게 모욕당하고 있는데!”

“그럼 기록관에 직접 문의해 보시죠. 저희 부서 소관이 아니라서요.”

역사의 기록이 훼손된 채 다중 앞에 전시되는데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독재정권의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지키려 했던 세상의 무관심이었다. 연단 위에서 그는 자신이 지켜낸 역사의 의미를 역설했지만, 연단 아래 그의 얼굴은 우스꽝스러운 가십으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박동욱 회장의 모멸감은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켜야 할 역사의 상처였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 시월재단 상임위원의 번호를 눌렀다.

“위원님, 안희진입니다. 김장수 기자의 P대 대운동장 사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내가 애써 차분히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그 사진 말입니까. 무슨 일로….”

“몇 년 전 재단에서 ‘잘못 알려진 사진’이라고 공지하셨더군요. 가짜라는 뜻 아닙니까?”

그는 마치 준비된 답변처럼, 능숙하게 핵심을 비껴갔다.

“안 선생, ‘가짜’라는 말은 지나칩니다. 우린 그저 ‘사실과 다른 기록’으로 정리했을 뿐입니다.”

“위원님.”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부마항쟁 사진이 아닌 걸 부마항쟁 사진이라 말해왔잖아요, 말하자면 가짜를 진짜로 포장해왔죠. 이게 가짜가 아니라고요?. 왜 사실을 숨기고 ‘곤란하다’는 말만 반복하십니까?”

“이해해 주세요. 이건 민감한 사안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했다. 그의 목소리는 진실을 가로막는 차가운 유리 벽처럼 느껴졌다. 나는 전화를 끊으며 분노보다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일상의 모든 것이 멈춰 섰다. 새로 들어온 역사 탐방 섭외 메일은 손조차 댈 수 없었다. 지금껏 내가 말해온 것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무슨 얼굴로 다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고뇌로 밤을 지샌 날들이 1주일이 넘었다. 하지만 이 무력감의 끝에서, 나는 오히려 단단한 결심을 마주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모든 단서를 들고 ‘K 민주주의연구소’의 젊은 연구자 이근영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처음엔 두 사건을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하나는 시스템의 오류, 다른 하나는 개인에 대한 모욕. 하지만 내가 내민 두 파일 위에서, 모든 것을 조롱하듯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김장수. 그 순간, 흩어진 점들이 하나의 악의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역사의 이름으로 역사를 짓밟는, 가장 교활한 반역사였다

나의 양심적 자책에서 비롯된 의문은 이근영 박사의 전문적 조사와 만나 ‘진실 규명’이라는 단단한 목표로 나아갔다. 우리는 주말도 잊은 채 만났다. 나는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의 증언을 모았고, 이 박사는 기록과 서류 속에서 진실의 조각들을 엮었다. 우리는 ‘가짜 사진’의 뿌리를 파헤치는 외로운 탐사자였다.

이 박사의 조사는 대학 홍보실 직원이 무심코 던진 말, ‘P대 기록관’에서 시작되었다. 며칠 뒤, 그는 지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그의 손에 쥔 노트는 김장수의 거짓 탑을 무너뜨릴 다이너마이트 같았다. 그는 낮고 빠른 목소리로, 기록관에서의 일을 보고하듯 말했다.

“기록관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부딪혔습니다. 직원은 처음부터 ‘허가’ 운운하며 길을 막더군요. 홈페이지 공지를 근거로 따지고 들어서야 마지못해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사는 절대 불가라고 합디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태도가 역력했죠.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사진들은 기증된 게 아니었습니다. 1999년, 김장수가 대학 도서관에 돈을 받고 판매한 CD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운동장 사진도 괴사진도 확인했어요. 이건… 부인할 수 없는 거래 기록입니다. 판매자 서명까지 선명해요.”

그의 말은 내 마지막 희망을 산산이 부쉈다. 가짜라고는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거짓의 뿌리는 다름 아닌 ‘역사의 기록자’ 김장수 자신이었다. 차가운 분노와 함께 깊은 의문이 나를 휘감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이근영 박사는 김장수가 사진이 담긴 CD를 대학 도서관에 돈을 받고 판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돈이 주된 동기일 거라 결론 내렸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돈이 주된 동기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괴사진은 돈만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돈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사진을 그렇게 왜곡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박동욱 회장을 깊이 혐오한 결과입니다.”

이근영 박사의 말에, 나는 박동욱 회장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건으로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했다.

며칠 뒤, 나는 박동욱 회장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하얀 책장에 꽂힌 부마항쟁 보고서와 구술사 책들이 그의 지난 세월을 증언하는 듯했다. 그는 담담히 물 한 잔을 내밀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씻기지 않은 모멸감이 깃들어 있었다.

“안 선생, 아십니까? 그 사진을 보고 내가 김장수에게 직접 메일을 보냈어요. 내 얼굴이 왜 그런 꼴로 돌아다니는지,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따져 물었죠.”

말을 멈춘 그는 창밖을 잠시 응시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입을 열었다.

“답장이 금방 왔어요. 사과도, 설명도 없었죠. 그저…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더군요.”

나는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열어보니 그 괴사진이었어요. 나를 조롱하던 바로 그 사진을, 내게 다시 보낸 겁니다. ‘이게 네 얼굴이다’라고 말하는 듯했죠. 그 순간,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어요. 이건 실수가 아니라, 내 존재를 짓밟으려는 악의적인 폭력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인간의 존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어찌 이리 잔혹하게 유린될 수 있는가. 김장수의 행위는 단순한 왜곡을 넘어, 피해자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과시하는 파렴치한 태도로 보였다.

그 악의에 맞설 유일한 무기는 진실뿐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근영 박사가 구해온 박동욱 회장의 출소 원본 사진이었다. 40여 년의 세월이 내려앉은 흑백 이미지 위로,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스쳤다.

박 회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진을 응시하는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사진 속 자신의 얼굴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잃어버린 유물을 어루만지듯,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진이지. 이게 진짜 내 얼굴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억눌린 감정이 그 안을 맴돌았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내가 마냥 웃고 있는 줄 알겠지만….”

나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솜옷을 입고 손을 흔들며 짓는 옅은 미소는 고난의 흔적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감옥에서 풀려난 저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감회가 스쳤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봤던 ‘괴사진’ 속 희극 배우 같은 얼굴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사진 속 회장님은 웃고 계시지만, 그 미소가 오히려 아픔을 새기고 있습니다. 시대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요.”

박 회장은 사진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엔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자의 서글픔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김장수는 그 아픔을 지워버렸어. 고통의 흔적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값싼 조롱을 억지로 채워 넣었지. 그게 그의 방식이었소. 역사와 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

그의 마지막 말은 씁쓸한 체념 같기도, 혹은 이 모든 싸움의 본질을 꿰뚫는 결론 같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흑백 사진 속, 초췌하게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 위로 그의 길고 아픈 세월이 겹쳐 보였다.

나는 그를 위로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의 상처를 가슴에 새기며 다짐했다. 그것은 박동욱 한 사람의 상처를 넘어, 내가 지켜내야 할 역사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였다. 김장수의 거짓은 단순한 사진 조작이 아니라, 그날의 외침과 눈빛을 지우려는 시도였다. 나는 그를 향한 분노와 함께, 나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책을 느꼈다. 어떻게 내가 그 거짓을 모른 채 그를 ‘역사의 기록자’라 칭송했을까?

며칠 후 용기를 낸 나는 김장수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거만하고 위압적이었다.

“안희진 씨, 평소 연락도 없다가 무슨 일이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박동욱 회장의 괴사진에 대해 물었다.

“아, 그거? 내가 찍은 거지. 내겐 그 사진 한 장뿐인데, 뭐가 문제지?”

그의 태연한 거짓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근영 박사에게 들은 ‘부마항쟁 10주년 자료집’의 원본 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바꿨다.

“아, 그 사진도 있었지. 알아보니 그렇더군. 연속으로 두 컷을 찍은 거요.”

“그럼 필름도 두 장 다 가지고 계시겠네요?”

“필름은… M 일보에 두고 왔지. 내겐 디지털 파일뿐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거짓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는 국과수 감정 이야기를 꺼냈고, 그는 마지못해 동의하는 척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근영 박사의 집념은 꺾일 줄 몰랐다. 그는 먼저 사진 보정 전문가를 찾아 ‘괴사진’이 얼굴 각도, 그림자, 뒷사람의 표정까지 모두 달라 명백히 인위적으로 변조되었다는 소견을 얻었다. 이어 M 일보 조사부를 찾았다. 김장수가 필름을 신문사에 두고 왔다는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조사부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조사해보니 필름이고 뭐고 전부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원래 그건 규정 위반인데….” 김장수의 또 다른 거짓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우리의 조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새로운 균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열렸다. 연구소 홈페이지 익명 게시판에 짧은 댓글 하나가 올라왔다.

‘김장수 기자의 대표작, 동래서 앞 시위대 사진도 가짜. 진짜 작가는 따로 있습니다.’

이근영 박사는 그 댓글을 발견하자마자, 오랫동안 묻혀 있던 단서를 건져 올린 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김장수의 이름으로 알려진 부마항쟁 사진들을 하나씩 출력해 날짜별로 분류했다. 연구소의 하얀 형광등 아래, 우리는 화이트보드에 그의 흑백 사진들을 시간순으로 붙여갔다.

10월 16일. P대 대운동장, 온천장, 동래경찰서, 교육대학 앞. 항쟁의 불길이 타오른 첫날의 장면들.

10월 17일. 구자춘 내무장관의 기자회견, 남포동의 최루가스, 비상 국무회의를 마친 각료들, 비상계엄령을 발표하는 문공부 장관.

10월 18일. 포고문을 읽는 시민들, 거리의 계엄군, 시청 앞의 탱크와 장갑차.

사진들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자, 유령 같은 패턴이 떠올랐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숨이 멎는 듯했다.

“박사님,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죠?”

“16일 사진들… 전부 우리가 가짜라고 의심하거나,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확인된 것들뿐이에요.”

내 말에 이 박사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진들을 훑었다.

“안 선생 말이 맞아요. 더 기묘한 건, 17일 이후 김장수가 직접 찍은 듯한 사진들엔 시위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계엄군, 장관, 텅 빈 거리뿐… 저항하는 군중은 단 한 장도 없어요.”

그의 손가락이 사진들을 하나씩 짚었다.

“수많은 구타와 피해 사례가 기록되었는데도, 그의 사진엔 계엄군이 시민이나 학생을 진압하거나 연행하는 장면이 단 한 장도 없어요. 그는 폭력의 현장을 고의로 외면한 겁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각들이 맞춰지며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결론은 세 가지입니다.” 이근영 박사가 말했다. “첫째, 10월 16일 항쟁의 불길이 타오를 때, 김장수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둘째, 그는 시위대를 단 한 번도 찍지 않았어요. 셋째, 계엄군의 폭력을 기록한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이게… 과연 역사의 기록자입니까?”

그의 사진에는 ‘기록’은 있었지만, ‘증언’은 없었다. 그것이 그의 본질적 한계이자, 진짜 현장의 사진을 훔쳐야 했던 이유였다. 우리의 분석은 하나의 가설로 좁혀졌다. 김장수는 역사의 심장부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대표작, 동래경찰서 앞 시위대 사진은 누구의 것인가?

이 박사는 두 갈래로 움직였다. 그는 먼저 연구소 홈페이지에 ‘사진의 진짜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공지를 띄웠다. 동래서 앞 사진을 썸네일로 올리고, 1979년 10월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제보를 기다린다고 적었다. 그것은 허공에 던진 메아리 없는 외침 같았다.

동시에, 그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단서를 찾았다. 박정희 시대를 찬미하는 저술로 유명한 언론인 J의 낡은 기사들이었다. J는 보수 논객답게 부마항쟁을 박정희 이야기의 부록처럼 다뤘다. 아쉬웠지만 대체할 자료가 없었다. 이 박사는 그의 월간지 기사들을 샅샅이 뒤졌다. 역설적이게도 진실의 파편은 때로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 숨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끝에, 그는 2006년 5월호 월간지 구석에서 결정적 문장을 찾아냈다. J는 당시 기자들이 사진을 찍지 못한 이유를 ‘살벌한 언론 통제’ 때문이라 변명했지만, 그의 글은 사진의 출처에 대한 중대한 단서를 담고 있었다:

H 신문의 김장수 기자는 데모 취재를 가려다 편집국장의 ‘그런 곳엔 가지 말라’는 제지를 받았다. … 부산 시위의 현장 사진은 이 기사에 실린 것이 거의 유일한 자료로 보인다. 그 사진도 기자가 찍은 것이 아니라, 한 P대 학생이 촬영한 것이다.

J의 기사에 실린 작은 사진은 김장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동래서 앞 시위대’ 사진이었다.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김장수는 그날 동래서 현장에 없었다. 역사의 격동을 포착한 이는 이름도 빛도 없이 그 현장을 지킨 P대 학생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이근영 박사는 문득 박동욱 회장이 떠올랐다. 그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동래서 시위대 사진이 당시 P대 학생이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아시는 바 있으신가요?”

“아… 그 얘기,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소.”

“혹시 누가 찍었는지 떠오르는 분 없으신가요?”

“음… 안타깝게도,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런데 다른 얘기지만, 김장수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게 10월 17일이라는 건 아시오?”

“네? 17일이라뇨?” 이 박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니까 항쟁이 터진 16일에는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는 거요. 김장수 기자의 옛 구술 인터뷰를 찾아보시오.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했소.”

박동욱 회장의 말이 결정타였다. 이 박사는 J 기자의 글에서 단서를 얻은 데 이어, 김장수의 과거 구술 인터뷰 자료를 낱낱이 뒤졌다. 며칠 밤을 새운 끝에, 그는 10여 년 전 출간된 구술사 자료집에서 문제의 문장을 찾아냈다. 항쟁 당시를 회고하며 김장수 본인이 이렇게 말했다.

16일에는 취재를 못 했고, 현장에 나간 건 17일부터였다.

화이트보드 위에서 떠오른 직관은 J 기자의 글과 김장수 자신의 발언을 통해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굳어졌다. 김장수는 단순히 사진을 훔친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름 없는 학생의 용기와 그 시대 언론이 외면한 진실까지 통째로 도둑질했다.

하지만 진짜 작가는 여전히 ‘이름 없는 학생’으로 남아 있었다. 김장수와 J는 ‘살벌한 언론 통제’를 핑계로 현장 부재를 정당화하며, 그 공백을 김장수라는 유일한 영웅 신화로 메웠다. 그 신화에 균열을 낼 다른 목소리가 절실했다. 이근영 박사는 사진작가 정형수의 이름을 꺼냈다. 부산 사진계를 지켜온 원로이자 엄격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진짜 기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진짜 기록자를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소문했을 때 정형수 작가는 2년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역사의 기록자’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 없었고, 사진집 한 권 내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했다. 이근영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부인을 찾아냈다. 주말 오후, 우리는 작가의 낡은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먼지 쌓인 유품들 사이에서 부인은 남편의 오래된 앨범 하나를 말없이 내밀었다.

“그이는 평생 자기 사진을 자랑한 적이 없어요.”

“아… 네.”

앨범을 넘기던 우리의 손이 한 장 앞에서 멈췄다. 1979년 10월, 광복동 거리. 프레임을 가득 채운 시위대의 함성이 담긴 사진. 정형수의 작품이었다. 김장수의 사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렌즈는 시위대와 눈높이를 맞추며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약간 높은 각도로 촬영된 사진은 보는 이를 순식간에 항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이건… 참여자의 시선이에요.”

내가 나지막이 말하자, 이근영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김장수의 사진이 안전한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시점이라면, 이건 현장의 위험을 감수하며 군중과 호흡하는 참여자의 시선이죠. 김장수의 렌즈가 권력을 향했다면, 정형수의 렌즈는 저항하는 시민을 정면으로 마주했어요.”

사진 속 얼굴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외치는 표정과 서로의 어깨를 잡고 나아가는 몸짓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대의 아픔과 저항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뜨거운 증언이었다.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인은 이 순간을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했죠.”

그는 최루가스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진을 찍었고, 진정한 역사의 기록자가 되었다. 김장수의 ‘유일한 기록자’라는 허명은 무너졌다.

연구소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던 것은 ‘그날을 기억합니다’라는 간결한 제목의 익명 메일이었다. 첨부된 사진은 가장자리가 바스러진 캔버스에 그린 유화였다. 거칠고 투박한 붓 터치가 계엄군과 청년의 실루엣을 붉은 터치로 생생히 담았고, 시간의 흔적이 노란빛으로 스며들어 그날의 공포를 간직한 듯했다. 메일의 내용은 짧았다.

저는 화가가 아닙니다. 국제시장 근처에서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한 청년이 내 앞에서 그렇게 끌려갔습니다.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사진기라도 있었다면…. 결국 집에 돌아와 본 것을 캔버스에 그렸습니다. 수십 년간 나만 간직한 그날의 기록입니다.

메일 끝에는 연락처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근영 박사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건 단순한 단서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이의 증언이 우리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이틀 뒤, 우리는 국제시장 골목 어귀 낡은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줄무늬 셔츠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이가 우리를 맞았다. 깊게 팬 주름은 그의 나이를 드러냈으나,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름은 표승민이었다. 작은 책상 위에는 먼지 쌓인 서류와 오래된 계산기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우리를 좁은 소파에 앉히며 따뜻한 캔 커피를 내밀었다

“그 유화를… 왜 보내셨어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틈으로 시장의 북적이는 소음이 스며들었다. “그날, 나는 겁쟁이였어요.” 그는 차분하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았다. “청년이 끌려갈 때, 나는 숨죽이고 창문 뒤에 숨어 있었죠. 그 젊은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거리로 나갈 용기도 없었어요. 그래서… 붓을 들었죠.”

그는 유화를 그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1979년 10월의 밤, 그는 불 꺼진 방에서 캔버스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붓을 움직였다. 계엄군의 검은 그림자와 청년의 비틀린 몸짓이 붉은 물감 속에 스며들었다. “그림은 내 죄책감이었어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적어도 이렇게 남기고 싶었죠.”

그의 이야기는 정형수의 사진과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같은 시대의 아픔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록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 유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그날의 진실을 증언한 기록이에요.” 표승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나는 기록자가 아니에요. 그저… 잊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나는 깨달았다. 역사의 기록은 김장수 같은 유명 사진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을 빼앗긴 사진가의 필름, 세상을 떠난 노작가의 앨범, 사진 대신 캔버스에 기억을 남긴 평범한 시민의 그림 속에 있었다. 김장수의 신화는 이들의 존재를 지워버림으로써 완성되었다.

우리는 이제 김장수의 ‘가짜’를 넘어, 그가 묻으려 했던 ‘진짜’ 기록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때였다. 방법은 명확했다. 우리가 찾아낸 증거를 대중 앞에 펼쳐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 이근영 박사는 ‘부마항쟁 사진 리뷰전: 기록과 상처, 그리고 진실’이라는 공개 행사를 기획했다.

행사 당일,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귀빈석의 가장 중요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김장수의 휴대폰으로 수차례 전화했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초청에 응했던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은 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무대에 오른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엔 귀한 손님 한 분을 모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지 않으셨죠. 그분의 빈 의자는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진실의 무게를 대신 말해줍니다.”

나는 텅 빈 귀빈석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저는 지금껏 해왔던 해설이 아닌, 다른 해설을 하려 합니다. ‘가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인사말을 마치고, 숨을 한번 고른 뒤 스크린에 동래서 앞 시위대 사진을 띄웠다. 장내에 나지막한 술렁임이 일었다. 나는 그 술렁임 속에서, 한 대학생의 이메일에서 시작된 진실을 향한 여정을 차분히 설명해나갔다. 이어 박동욱 회장의 원본 사진과 ‘괴사진’이 나란히 스크린을 채우자, 객석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는 전문가의 변조 소견과 김장수가 대학에 CD를 판매한 거래 기록을 차례로 띄웠다. 마지막으로, 김장수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 파일이 재생 버튼과 함께 화면에 떴다. 내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그의 오만한 반말이 앰프를 통해 행사장을 채웠고, 청중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이근영 박사는 스크린에 다섯 단어를 띄웠다: 명성, 돈, 도용, 유일성, 응징.

“김장수 기자가 부마항쟁 사진가로 명성을 얻은 건 1989년 『부마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 덕분이었습니다. 그 책의 ‘사진으로 본 부마항쟁’ 코너에 P대 대운동장, 동래서 앞, 박동욱 회장의 출소 사진이 실렸죠. 당시엔 그 사진은 변조되지 않은 원본이었습니다. 이 자료집으로 김장수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독보적인 사진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음은 돈이었습니다. 그는 명성을 이용해 부마항쟁 사진을 사업화했습니다. ‘김장수 컬렉션’을 만들어 민주광장, P대 도서관, 여러 단체에 팔았죠. 1989년 민주광장, 1999년 P대 도서관에 사진을 넘겼고, ‘포토·히스토리아’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돈을 좇아 M 일보 소유의 사진이나 동래서 앞 시위대 사진 같은 타인의 작품에 자기 이름을 붙여 팔았습니다. 이는 저작권 침해를 넘어 사기에 가까운 행위였습니다. 시월재단 설립 때도, 다른 전시회에서도 그는 사진을 팔았습니다.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은 집요했습니다.

명성과 돈을 손에 쥔 그는 스스로를 부마항쟁의 ‘유일한 기록자’라 내세웠습니다. 정형수 선생의 사진이 공개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유일성을 고집했죠. 그에게 부마항쟁은 권력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다 1999년, P대 도서관에 사진을 팔며 박동욱 회장의 출소 사진을 변조한 ‘괴사진’을 끼워 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박 회장은 특별한 갈등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아마 그때였던 것 같소. 부마항쟁 10주년 모임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김장수 기자가 다가오더니, '내 사진 덕 좀 봤으면 술 한 잔은 사야지' 하더군요. 자기가 찍은 역사적인 사진이니 보답을 하라는 거였지. 그 후로 그 양반을 사석에서 본 일은 없으니… 글쎄. 그깟 술 한 잔 안 사준 게, 수십 년간 나를 향한 증오가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김장수는 박동욱 회장을 깊이 혐오했습니다. 그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괴사진으로 증오를 드러냈고, 심지어 자신이 판 파일에서 박동욱 회장의 원본 사진을 지워버렸습니다. 지금 시월재단 아카이브나 민주광장 전시에서도 그 원본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사진의 공적 가치, 역사의 무게를 제멋대로 짓밟았습니다. 스스로 역사적 기록을 지울 권한이 있다고 여겼죠.

그의 성격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구술 기록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1979년 10월 17일 밤, 광복동에서 사진을 찍다 경찰 기동대에 붙잡혀 구타당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의 취재는 눈에 띄게 소극적이 됐죠. 그는 쭈뼛거리며 공수부대 출신임을 밝혔습니다. 국가 폭력에 익숙한, 어쩌면 그것을 내면화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사진엔 계엄군의 폭력이나 시민의 저항이 단 한 장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단순히 두려움 때문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계엄군을 부정적으로 보일 장면을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국가가 주입한 질서 의식, 혹은 역사의식의 부재가 그의 렌즈를 가렸습니다. 그는 역사의 무게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세계는 혐오와 응징이라는 파시즘적 시각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근영 박사의 발표가 끝나고, 나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스크린에 세 개의 이미지를 나란히 띄웠다: P대 학생의 ‘동래서 앞 사진’, 정형수의 ‘광복동 시위대’ 사진, 익명 시민의 ‘끌려가는 청년’ 유화.

“역사의 기록은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이 지워지고, 때로는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모여 완성됩니다. 우리는 오늘 한 명의 가짜 기록자를 드러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진짜 기록자들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는 그들의 용기를 기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청중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든 시선이 텅 빈 귀빈석으로 향했다. 김장수의 부재는 소리 없는 고백처럼 행사장을 채웠다. 그가 평생 외면한 진실의 풍경 위로, 그의 빈자리는 오래 감춰진 증언처럼 조용히, 그러나 선명히 퍼져갔다.

몇 달 뒤, 나는 새로운 탐방 그룹을 이끌고 P대 교정에 다시 섰다. 시월재단은 부마항쟁 아카이브에서 대운동장 사진을 따로 빼내 1987년 사진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재단이 한 일은 이게 전부였다. P대의 김장수 표석은 그대로였다. P대학 기록관도 어떤 조치도 없었다. 다만 홈페이지에 올린 김장수의 부마항쟁 컬렉션 홍보는 사라지고 없었다. 변화는 아주 더뎠다.

나는 표석 앞에 멈춰 섰다. 김장수의 이름이 새겨진 돌은 여전히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 이름은 한때 역사의 기록자를 상징했지만, 이제는 거짓의 무게로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교정을 둘러보았다. 1979년의 함성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함성 속에는 정형수의 렌즈, 표승민의 붓,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완벽한 해설을 꿈꾸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상처와 용기를 이야기했다. 새로운 탐방에서 나는 정형수의 사진과 표승민의 유화를 소개하며, 한 학생의 질문에 답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야 나오는 건가요?” 그 물음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우리가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김장수의 신화를 넘어, 진짜 기록자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겼다. 나는 깨달았다. 역사는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다시 발견되는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나는 그 증언의 일부가 되어, 부서진 진실의 조각들을 주워 올렸다. 이제 나는 비소로 ‘진짜’를 해설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