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

임수생 시인

1979 년 10월 16일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되어
거리와 골목
교정과 광장에서
민중의 손에 들려
노동자와 농어민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학생들의 손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되어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광복동과 남포동, 국제시장과 충무동 미문화원 근처
부산극장 주위는
시위대의 물결로 가득 넘쳤고
혁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며 해안을 뒤덮었다.
곳곳에서
군부독재 타도가 터져나왔다.
우리들의 절규는
우리들의 항거는
우리들의 혁명은
진압대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분연히 떨쳐일어섰다.
총칼이 번뜩이며 불을 토했다.
장갑차가 시위대를 깔고 뭉갰다.
꽃들은
깃발을 들고 물결치며 행진하던 꽃들은
짓밟히며 땅 위에 피를 쏟았다.
피는 보도를 물들이며
강물되어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 위로 시위대의 함성은
밤하늘을 찢으며 솟구치고 솟구쳤다.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날이 밝아 아침이 오면 올수록
항쟁의 불꽃은
활활 불꽃을 드높이며
산하를 밝혔고
20 년 군사독재정권은 드디어
심복의 손에 의해 무참히 붕괴됐다.

우리들의 항쟁을 누가 짓밟는가.
우리들의 죽음을 누가 헛되이 짓뭉개는가.
우리들의 항쟁은
우리들의 죽음은
깨꽃보다 더한 짙은 피로
강력한 빛을 발하는 혁명으로 직결돼
역사의 장에 획을 그었지만
군부는 총칼을 휘둘러
깨꽃혁명을 짓이겨버렸다.
거대한 힘으로 자유를 쟁취한
우리들의 투쟁은
역사적, 민족사적 기념탑을 우뚝 세우기 전에
역사의 아이러니
더 강한 군부독재를 탄생시킨
쓰라린 결과를 맛보았다.
우리들의 투쟁적 열정을
거대집단이 폭력을 동원해
깡그리 망가뜨려버렸다.
민중이여
깨어있는 대중이여
군의 부당한 정치개입을 타도하자.
민중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겨눈
맨손의 민중
맨손의 형제 가슴에 총탄을 퍼부은
군의 횡포는
민중사를 핏빛으로 장식할 뿐
민주주의를 저 멀리로 후퇴시킨다.
타오르는 횃불은 민중의 힘이다.
민중의 힘은 횃불이 될 때 폭발한다.
민중은 민중의 삶이
절대권력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
자유로운 삶의 해방을 위해
항쟁의 횃불에 불을 당긴다.
혁명이여
혁명정신이여
우리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쟁은
우리들의 거대한 민중항쟁은
자유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자주와 평화를 위한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역사의 현장
민중의 절대한 힘을 하나하나 찾아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민주투사 만세.
혁명투사 만세.

부마항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前夜

1979년 달력을 찾아보니 10월 15일은 월요일이었다.이날 오전에 수업이 없었던 터라 느지막하게 학교로 갔다.

교련수업이 오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학교로 간 시간은 1시가 넘어서였다. 겉으로 드러난 대학 풍경은 평온했다.
그러나 이 평온함은 불안한 것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경 부산대 도서관에서 민주선언문이 뿌려졌다.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선언문을 뿌렸던 이도 도서관 앞에 모여들었던 이도 모두 흩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이날 시위가 실패함에 따라 사전에 이 움직임을 인지하고 여기에 기대를 걸었던 학생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일부에서는 ‘부산대는 안 된다’는 자조적인 패배감에 젖어들었다.
이날의 시위 실패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식을 접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싸워야 한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준비하여 내일 새로운 투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나는 순식간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 시국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히 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경제학과 황헌규, 경영학과 박준석을 본관 아래 운죽정에서 만났다. 그리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경찰이 학내 곳곳에 쫙 깔렸는데 가능하겠는가? 그들은 처음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일 시위는 반드시 성공한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친구들을 설득했다. 결국 친구들은 나의 거사계획에 동의를 표했다.
다음은 등사기를 구하는 일이었다. 선언문을 인쇄하려면 등사기가 있어야 했다. 아는 사람을 찾아 학교를 돌아다녔다. 이때 우연히 수학과 3학년생 김종세를 만났다. 김종세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를 알게 된 계기는 4월 19일 ‘1인 시위’때였다.
나는 그날 친구하고 산성에 올라가서 막걸리를 한잔하고 내려왔다. 4.19 19주년을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보낸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검은 매직으로 4.19 19주년이라 쓴 한지를 들고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도서관은 발칵 뒤집혔다. 이때 웅성거리는 학생들 틈에 있던 누군가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 친구가 김종세였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등사기 부탁을 했다. 그는 아카데미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당시 서클에는 등사기 한대는 구비되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등사기를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뜻밖에도 ‘NO’였다.

나는 다시 준석이를 만났다. 준석이는 경남고 동기였던 지질학과 3학년생 전정욱을 생각해냈다. 그는 서클 회장을 지냈다. 나와 준석이는 일단 경제학과 친구인 전도걸의 집이 있는 연산동으로 갔다. 도걸의 부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필시 시험출제용 줄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걸에게 시위계획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했다. 도걸은 아무런 주저 없이 줄판을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부곡동에 있는 전정욱의 집으로 갔다. 다행히도 집에 등사기가 있었다. 시위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는 눈치를 채고서는 “잘해 보라”며 기꺼이 등사기를 빌려주었다. 우리는 등사기를 여러 번 신문지로 포장하고는 조심스럽게 집을 나섰다.
이날 저녁 경영학과 친구 엄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16일 오전 시위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다! 도와 주마!” 정의를 위해 옳은 일을 하겠다고 어렵게 도움을 청하는 친구를 외면하기 싫었다. 비겁하게 도망가기 싫었다. 훗날 엄태언은 이렇게 증언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일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우암동 다락방의 선언문 작업

우리는 택시에 등사기를 싣고 우암동으로 이동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 우암초등학교 옆 문방구에 들러서 8절지 시험지 5~6백매와 등사원지 그리고 줄필을 구입하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넘었다.
나는 라면 세 개를 사서 끓였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라면 말고는 내놓을 게 없었다. 가난한 만찬이 끝난 후 다락방으로 올라가 선언문 문안 작업에 들어갔다. 며칠 전 끄적거려 놓은 노트를 꺼내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특별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언문이 준비되었다.

돌아보면 선언문은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잘 다듬어지지도 못했다. 격정이 앞섰다. 대학 2학년생이 공부가 되었으면 얼마나 되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매끈한 글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부족하지만 선언문은 반유신의 격문으로서는 그런대로 쓸만했다.
선언문 문안이 잡히자 곧 등사작업에 들어갔다. 벌써 밤 12시 가까이 되었다. 우리는 이 작업을 하면서 극도의 흥분과 불안 그리고 어떤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상태에 있었다.
이 때 준석이가 일어섰다.

“집에 일이 있어서 오늘은 들어가야 한다. 내일 10시에 만나자.”
선언문 작업이 지체된 탓이었을까. 하여간에 준석이는 떠났다. 갈 길이 먼데 인쇄 상태조차 만족스럽지 못했다. 절반 정도가 흐릿하게 나왔다. 몇 번이고 롤러를 새로 밀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가고 … 할 수 없었다. 이거로 작업을 할 수밖에 …. 나와 도걸이는 정신없이 작업에 열중했다. 나는 롤러를 밀고 도걸이는 유인물을 끄집어냈다. 내 교련복 바지는 시커먼 등사 잉크투성이였다. 도걸이의 두 손도 시커멨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도걸이가 일어섰다.
“나도 집에 갔으면 좋겠다.”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작업이 끝나려면 몇 시간이 더 걸리는데 혼자서 어쩌란 말이냐?”
사정사정하여 도걸이는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상대 앞 벤치에서 만나기로 하고….
등사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는 새벽 4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혼자서 다락방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푸른빛의 신새벽

1979년 10월 16일 새벽은 명징했다. 어둠 저편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점차 푸른빛으로 다가왔다.

도걸이 가고 없는 그 시간, 홀로 있는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푸른빛의 신새벽을 맞이하는 설레임이 있었다. 학우들과 함께 민주화의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것만큼 더 큰 희망이 어디 있었겠는가.
몇 해 전 어느 책에 썼던 글이다. 거의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부산대학교 정문에 도착한 시간은 9시경이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옅은 가을 햇빛을 머금은 금정산과 그 아래 하얀 대학 본관(현재의 인문관) 건물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는 여느 때처럼 새벽벌의 빛나는 아침을 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러나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소지한 검정색의 네모난 가방 속에는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 300장이 들어 있었다.
이 당시는 작가 이병주가 말한 것처럼 ‘긴급의 시대’였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1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체제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규정은 철저히 유린되었다. 헌법을 밟고 선 체제가 바로 박정희 유신체제였다. 이런 체제는 당연히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수지만 반체제의 지식인, 대학생들의 저항이 잇따랐다. 박정희는 이에 대해 긴급조치 발동으로 대응했고 1975년 5월부터 시행된 것이 긴급조치 9호였다. 긴급조치 하에서 박정희의 유신을 비판하는 것은 모조리 ‘긴급조치 위반’이 되었고 유기징역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처벌을 받은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이 제적 또는 출학처분을 받고 학교로부터 쫓겨났다.
이러한 ‘긴급의 시대’에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소지하고 학교로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사히 교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였지만 정문 앞은 의외로 조용하였다. 어느 누구도 내 가방에 관심을 표하는 이가 없었다. 외관상 그냥 평범한 대학생 가방이었니까. 나는 선언문이 든 가방을 들고 유유히 교문을 지나 약속 장소인 상대(지금의 자연과학관) 앞 벤치로 걸어갔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유신의 폭정 아래서 선언문을 뿌리고 액션을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학생대중이 참여하는 시위를 조직해낼 것인가가 문제였다. 유신체제 하에서 대중적인 반유신투쟁은 보기 드물었다. 학원사찰 등 전반적인 감시 체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대는 이런 경험이 전무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바로 전날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당시로서는 잘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을 생각했다. 외부로부터의 무차별적인 유인물 살포는 지양하고 수업시간 10분 전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아지하여 시위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성공이냐 실패냐 이런 걸 미리 이야기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단 시도해보는 것, 이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10·16 최초의 시위

1979년 10월 16일 새벽은 명징했다. 어둠 저편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점차 푸른빛으로 다가왔다.

9시 40분.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초초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 2교시 화폐금융론 수업시간 전에 강의실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이때 엄태언이 나타났다. 나는 엄태언에게 선언문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인문사회관(지금의 제1사범관) 206호에 당도하여 학우들에게 선언물을 배포했다.
나는 곧장 강단으로 달려갔다.
“여러분 우리 이제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10월 16일 상대 학생들을 마주보고 ‘정광민’이 했던 최초의 발언은 이런 것이었다. 연설이라기에는 너무 짧았다. 당시 강의실에 있던 학생은 약 70여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언과 성식은 학생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수는 순순히 호응하였다. 학생들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정광민을 따라 지근거리에 있는 상대 쪽으로 줄을 지어 이동하였다. 당시 상황을 엄태언은 이렇게 증언했다.
일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산발적으로 웅성거림만 있은 후 불발 시위로 끝난 그 전날과는 너무나 판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교실에 있던 모든 학우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분연히 일어나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상대 앞에 결집한 학생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위대오가 형성되었다. 10월 16일 최초의 시위는 부산상대생의 시위였다. 부산시경 분석 자료에 의하면 데모가 시작된 시점은 9시 53분이었다. 이것이 부마항쟁의 시발점이었다. 부산상대 시위대는 ‘통일’을 ‘자유’로 개사한 노래도 불렀다.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놀라 창문 밖을 내다보았고 대학은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정광민은 선언문 이면지에다 ‘자유’라고 쓴 종이 피켓을 양손으로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상대 시위대는 4열로 줄을 지어 구호를 외치면서 미라보 다리를 지나 도서관 쪽으로 행진하였다. 상대에서 미라보 다리를 지나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약 300 미터 정도 되는데, 주변에 음대, 자연대, 문리대, 대학 본관, 그리고 공대가 위치한 사실상 부산대의 메인스트리트나 다름없었다. 시위대가 상대에서 도서관 앞까지 행진한 시간은 5분에서 10분 정도일 텐데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했기 때문에 이때 이미 부산대 학생은 대부분 시위가 터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수많은 학생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준석이도 이때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것이 1차 교내시위였다.

(출처: 시월의 노래/정광민, 헤로도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