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의 거리에서 만난 민중항쟁

구모룡

(사대 국어교육과 77학번, 한국해양대 교수)

1, 부산, 1979년 10월의 도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하여 남포동 등의 시내로 번져간 반체제 저항투쟁에 대하여 문화적 맥락으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선뜻 수락한 일이지만 두어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록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집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 미필적 고의로 회피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당시 3학년이었고 그 현장에 있었으나 그동안 10월의 부산항쟁을 숙고해 보진 않았다. 이틀의 투쟁이었고 마산으로 번져나기도 하였으나 열흘이 지나서 체제 내부에서 발생한 정변(박정희 대통령 피살)이 민중적 저항의 에너지를 급속하게 흡수해간 탓도 있다. 여기에다 이듬해 벌어진 광주항쟁의 강렬함과 그에 대한 부채감과 죄의식이 오랫동안 기억을 지배해왔다. 1980년대는 온통 5.18 광주와 함께하였다.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이를 이은 신군부의 보수반동체제가 광주를 짓밟고 들어섰기 때문이다. 돌이켜 볼 때 1979년 10월 시위가 불의에 굴종하는 자들의 부끄러움에서 일어선 행위라면, 1980년대는 시종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분투와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80년대의 신군부체제가 유신체제의 변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1979년 부산과 1980년 광주는 연속성을 지닌다.

개인적인 경험을 유추하면 1979년 10월 부산의 민중항쟁은 학생들이 촉발하고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봉기에 가까웠다. 이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 시대’(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의 전범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농민과 노동자를 희생하면서 국가 독점자본주의 성장연합체를 형성해온 유신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통제하는 독재체제였다. 도시 주변부에는 농민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한 다수의 기층민중이 생존과 싸우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개발과 성장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대부분 농민의 아들딸들인 대학생들은 이러한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들은 사회적 정의를 말할 수 없도록 침묵을 강요받고 사상과 문화적 자유를 구속받았다. YH 여성 노동자 탄압과 이어진 야당 총재의 제명과 같은 체제 말기적 징후 속에서 1979년 가을은 누군가 터트려주기를 바라는 풍선처럼 밑으로부터 불만과 분노가 충전되어 있었다. 1979년 10월은 짧았으나 자발적인 학생들의 저항운동에 도시 주변부 빈민, 노동자, 자영업자 등의 민중이 자연스럽게 동참한 도시 저항운동이었다. 어떠한 지도부가 있거나 조직이나 단일한 주체가 뒷받침한 항쟁으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적 코뮌을 형성한 1980년 광주와 시민이 주동한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10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구별된다. 1979년 10월이 개별 학생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촉발되었다면 1980년대는 대규모 운동권의 형성과 전개로 나타난다. 운동권은 1980년대의 범주이자 개념이다. 6월 항쟁의 넥타이부대라는 말이 상징하는 범주의 시민적 참여가 아직 1979년 10월엔 나타나지 않는다. 도시 주변부의 여러 소외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고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였다. 어쩌면 소수인 대학생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정형의 계급인 도시 변두리 사람들이 결합한 봉기라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1979년 10월의 부산 민중항쟁을 고의로 간과하려 하진 않았으나 사실 많은 이들이 괄호를 쳐왔다. 가령 최근에 간행된 『한국 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1979-2019』(한울, 2019)는 “3.1 운동부터 시작한 민주공화국 수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실천은 4.19 혁명과 5.18 항쟁, 6월 항쟁을 거쳐 촛불로 이어졌습니다”라고 요약한다. 그 높이에서 이들 봉우리에 견줄 바 되지 못한다는 생각일까?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연구로 정평이 난 이남희(유리, 이경희 역)의 『민중 만들기-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재현의 정치학』(후마니타스, 2015)도 1979년 부마항쟁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1970년대 “학생 시위가 캠퍼스 바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례로 언급될 뿐이다. 부마항쟁을 “1970년대 후반 도시하층민의 모순을 드러내는 밑으로부터의 도시봉기”로 규정한 이는 김원(「박정희 시기 도시하층민―부마항쟁을 중심으로」, 『근대의 경계서 독재를 읽다』, 장문석. 이상록 편, 그린비, 2006.)이다. 김원은 에릭 홉스봄이 말한 주변적 운동 가운데 하나인 ‘도시 봉기’에서 부마항쟁의 성격을 찾는다. 학생과 도시하층민의 연합이라는 관점보다 도시하층민의 폭동과 봉기에 더 방점을 두는 생각이다. 이는 야간 항쟁에서 최후까지 투쟁을 주도한 층이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상점 종업원 등 도시하층민이었다”는 고증에 근거한다. 초기에 학생이 주도하고 이에 시민들이 동조하다 점차 투쟁이 가열하면서 학생들이 이탈하면서 하층민 주도의 항쟁으로 진화하였다고 분석한다. 어느 정도 틀린 진단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이 아닌 동년배의 청년들이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준 국면도 많았다. 폭력이 잦아지고 폭동으로 변질하지 않도록 학생들이 비폭력을 외칠 때 이들이 자제하면서 협력하였다. 적어도 계엄이 선포되기 전의 야간투쟁 상황이 그러했다. 빵과 우유를 주고 쫓기는 이들을 숨겨준 시민들이 다수이다. 그렇다면 1979년 10월의 부산항쟁을 그 주체를 따라서 규정하긴 힘들다. 학생-노동자-도시 주변부-시민의 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합하는 말이 ‘민중’이 아닌가 한다.

차성환은 항쟁에 참여한 노동자에 주목하였다. 그는 『부마항쟁과 민중』(한국학술정보, 2014, *이 책은 2009년 박사학위 논문을 증보한 저술임.)을 통하여 노동자들이 적극적 행위자로 참여하고 있음을 실증하면서 기존의 민중상과 다른 ‘합리적 민중상’을 건져낸다. 항쟁을 체험한 노동자들의 변화도 이들의 주도성을 인정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차성환이 구술자료 분석 등으로 진행한 질적 연구가 가지는 의의는 크다. 만일 항쟁이 오래 계속되었다면 민중적 주체성이 더욱 오롯하게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1979년 10월 부산의 항쟁은 성공도 좌절도 아닌 상태로 중단되었다. 그래서 항쟁의 주체 탐문보다 자발적 복종 상태를 벗어나 저항과 투쟁, 봉기와 폭동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다양한 민중의 모습을 그려갈 필요가 있다. 일종의 느슨한 연대, 학생과 하층민과 시민의 자발적인 연합이라는 성격을 생각하게 한다.

2. 1979년 10월의 캠퍼스

그해 10월에 대하여 나는 어느 정도 일인칭 참여-관찰자의 시점을 갖는다. 10년 단위 역사의 마지막 해이어서 그러한지 중간고사를 앞두고 뭔가 모를 서늘한 분위기가 캠퍼스를 뒤덮고 있었다. 1978년에도 시위 기도는 있었지만 가라앉고 말았다. 미술교육과 고서경(드라마를 쓰기도 한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충격을 던졌다.)이 개최한 권투시합이라는 이벤트도 학생들의 열망을 모으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억압된 청춘의 욕망은 구정문 아래쪽 가게나 장전시장 식당에서 음주와 고성방가로 난폭하게 해소되었다. 자주 산성을 오르고 남포동 시내를 배회하여도 출구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군대 같고 감옥 같은 학교생활을 지냈다. 대학에서도 병영훈련이 있었고 교련을 이수해야 했다. 학도호국단 체제는 대학도 군대와 다를 바 없음을 강요했다.

어두운 시대에 대학생이라는 선민의식은 곧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친구들은 농사꾼, 공돌이, 여공, 식모, 버스차장으로 일했다. 같은 연배에서 대학생은 10%가 조금 넘는 분포였다. 열에 아홉은 국민학교에서 그치거나,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다. 억압받고 소외된 이웃에 대하여, 불의의 정권에 대하여, 학생들은 울분과 분노를 가슴에 품었다. 누군가 나서 불을 붙이면 바로 활활 타오를 듯한 가을이 1979년 10월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1980년대와 같은 조직적인 운동권은 없었다. 동아리는 엄격한 심의를 거치면서 감시를 받았다. 자발적인 소모임 독서회가 있었으나 운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개별적이거나 지하화했다. 그야말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인 시대였다. 텔레비전의 시대가 되면서 고고 댄스를 이어서 디스코 리듬이 들어오고 팝송과 통기타가 유행하였으나 청춘의 이상을 구가할 낭만과 자유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여기서 흐린 기억을 다잡기 위하여 《부대신문》 축쇄판을 뒤적여본다. 1979년 항쟁의 발원지인 부산대학교의 신입생은 3, 490명이고 1학기 전체 재학생은 11,537명이었다. 허종현 총장이 퇴임하고 6월 22일 박기채 총장이 취임했다. 2학기 등록 학생수는 12,510명이다. 10월 17일부터 37일간 휴교가 있었고 기말고사는 11월 28일 시행되었다.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발생한 항쟁이었기에 중간고사는 과제물로 대체되었다. 학생들은 모두 ‘유신 학점’을 받았다. 휴교에다 학기 단축까지 있었지만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116일간의 휴교에 비할 바 못 된다. 《부대신문》을 통하여 만날 수 있는 10월 부산항쟁에 관한 기사는 많지 않다. 1980년 1월 14 일자에 ‘긴급조치 9호에 관련된 제적생 10명 복교될 듯’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산경남지구계엄군법회의는 11월 28일 지난 16일부터 19일 사이 부산마산지역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와 관련, 구속된 87명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고 시위를 주동한 본교 공과대학기계설계학과 3년 이진걸군과 상과대학 경제학과 2년 전도걸군에게 소요 및 긴급조치위반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는데 부산경남계엄분소는 12월 5일 이들 본교생 2명에게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으로 감형 조처했다. 한편 지난해 10월 16일 상오 9시 40분 인문사회관에 유신철폐 등의 내용이 적힌 유인물을 배포하고 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교내시위를 주동,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던 상과대학 경제학과 2년 정광민군은 지난해 12월 27일 긴급조치 9호 해제와 함께 부산지방법원 제4형사부의 면소판결에 따라 석방됐다.

이진걸은 10월 15일 불발된 시위를 주동하였다.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학생들을 시위의 현장으로 이끌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만다. 기사의 내용을 볼 때 그는 18일 자정에 내려진 계엄령하에서 계엄군에 의해 체포,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전도걸은 16일의 시위를 이끈 정광민의 친구이자 동지이다. 그도 계엄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고 판단된다. 16일 <선언문>을 배포하고 상대 경제학과 2학년을 필두로 학생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정광민은 위의 기사로 볼 때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기사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실제 1979년 10월 부산대 시위의 주역들이다. 15일에 기획된 전도걸의 시도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실패하였다고 본다. 여기저기서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학생들이 정해진 장소로 모이기를 기대하였는데 그만한 호응을 이끌지 못했다.

15일의 시도에 관한 소식을 접한 정광민은 같은 학과의 동급학생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이끌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진술은 정광민, 『시월의 노래―10.16 부마항쟁 이야기』, 헤로도토스, 2019. 참조) 16일의 성공이 결집 단위를 앞세우고 시위대가 행진하는 코스를 효율적인 가로로 잡은 전술의 명민함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김선미(「1970년대 후반 부산지역 학생운동과 부마항쟁」, 『한국민족문화』 67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8.)는 15일과 16일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15일의 불발 소식이 정광민을 움직이는 추동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이진걸의 <민주선언문>과 시위 실패를 접하면서 16일의 시위를 결심한다.

그런데 15일의 소식은 김선미의 지적만큼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나 또한 15일에 대하여 들은 바 없다. 16일 정광민이 이끈 상대 2학년 학생들이 부산대학교의 중심 가로에 해당하는 본관 뒷길로 행진하는 가운데 주변의 학우들이 동참하였다. 이들이 도서관에 도착하자 도서관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합류하였다. 이 당시 도서관은 다양한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수업이 없을 때 너나없이 배회하는 공간이었다. 마침 중간고사 직전 주간이라 평소보다 학생들이 더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15일과 연관한 학생들이 여기서 정광민을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16일의 시도를 15일의 기획에 따른 ‘부산대 시위를 위한 플랜 B’라고 규정한 김선미의 주장은 억견에 가깝다. ‘플랜 B’라는 개념이 동일 주체의 대안 계획이라는 점에서 정광민의 용감한 단독 결행을 단순변수로 격하하려는 저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도서관 주변에 있었던 나로서 다양한 학우들이 시위 함성에 이끌려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모였던 사실을 기억한다. 정광민에 의해 촉발된 학생들의 저항운동은 비유하자면 어떤 유역처럼 자연발생적인 합류가 이루어지는 형국이었다. 유신체제에 불복하는 학생들의 정동(affect)이 큰 물길을 이룬 셈이다. 자발적 복종을 걷어내고 부끄러움과 자학과 우울을 떨치고 불의를 무너뜨리고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로 모였다. 1979년 10월의 캠퍼스를 달군 진정한 동력은 바로 이와 같은 학생 대다수가 지닌 정동이다. 정동은 경험의 살이고 실체이다. 이는 시대 상황과 직면하는 사건들 속에서 형성하고 이행하는 힘으로 새로운 이끌림과 관계를 창출한다. 이는 행위를 소환하여 기투와 연대를 형성하는 수행이다.(멜리사 그레그 외 편, 『정동이론』, 최성희 외 역, 갈무리, 2015.;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역, 갈무리, 2018. 참조) 12,000여 명의 재학생 가운데 5,000여 명의 학생들이 학내 시위에 동참하였으니 그야말로 요원의 들불로 타올랐다. 물론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별의식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야 없지 않았지만 거의 대다수가 동조하거나 참여한 시위였다. 학생 시위가 마침내 교외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으니 역사적으로 성공한 시위로 평가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1980년 3월 24 일자 《부대신문》은 ‘10.16 시위 관련 석방’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고 있다. “10.16 시위의 주동 혐의 관련 피고인인 본교 이진걸(기설.3)군과 전도걸(경제.2)군이 3월 6일 육군고등군법회의의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는 내용인데 이듬해 3월 6일에야 10월 항쟁을 주도한 학생들이 모두 풀려났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가혹하기만 했던 1980년의 봄이었으니 풀려난 몸인들 어찌 평안할 수 있었겠는가? 1980년 5월 15일의 기사는 8, 9일에 전개된 시위를 “10.16으로 이룩해 놓은 민주화 그 영원한 꽃을 위한 행진”이라 명명한다. 신군부 보수반동 세력에 대한 저항을 10월 항쟁의 연장선으로 인식하였다. 5월 17일까지 끊임없이 진행된 교내시위는 5월 18일 신군부 세력의 계엄선포로 휴교령이 내리면서 기이한 침묵의 시간으로 잦아든다. 우리는 멀리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탄압과 살육을 알 수 없었다. 유신체제는 사라졌으나 유질 동형의 신체제가 등장하였고 독재는 끝나지 않았다. 

3. <선언문>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를 촉발하고 앞장서 이끈 이는 정광민이다. 그에 앞서 15일에 이진걸의 기획이 불발에 그쳤다. 이진걸과 정광민은 각기 <민주선언문>과 <선언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진걸과 더불어 시위를 계획한 신재식(사회복지학과 2년, 복학생)도 단독으로 작성한 <민주투쟁선언문>을 남겼다. 이진걸과 신재식은 모두 선언문을 통한 선동에 실패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선언문을 나누어주고 학생들이 모이기를 기대하는 전술은 한계가 있다. 이진걸의 경우에 있어서 그와 연계한 세력이 있었다 하나 집합적인 형태를 보이지 못했다. 이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소극적이었거나 확신이 부족하였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선언문이 아니다. 집단형태의 움직임이다. 16일 정광민의 성공은 수업을 위해 모인 학생들을 집합적인 행동으로 유인한 데서 비롯한다. 활자화한 선언문이라는 매체가 행위를 유인하긴 어려우나 대면을 통하여 전달되는 느낌과 공감은 즉각적으로 행위를 유발한다. 소규모의 학생들이지만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데서 시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정광민과 상대 2학년 학생들을 1979년 10월 16일 시위를 촉발한 주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면서 세 편의 선언문이 가지는 맥락을 살펴보자.

이진걸의 <민주선언문>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의 자유, 자유와 인권의 보장, 독점자본의 구조적 모순, 대외종속 경제의 심화, 유신헌법 철폐, 독재집권층의 퇴진 등을 골자로 한다. 마지막 학우들에게 호소하는 문장을 통해 그는 억압을 뚫고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잡고 반민주의 무리, 자유의 착취 무리, 불의의 무리 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한다. 자유를 구속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자본을 독점하는 모든 모순이 유신헌법 체제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런데 선언문의 후미에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그야말로 선언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이에 반해 신재식의 <민주투쟁선언문>은 “1979년 10월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이라는 시위의 장소를 명시한다. 정작 시위로 유인하지 못하고 스스로 접어버린 선언문이지만 이진걸의 선언문에 비하여 그 내용이 구체적이다. 신재식의 선언문은 유신체제의 역사적 위치, 진실에 먼 민중의 처지, 종속 경제와 근로대중의 피폐한 삶, 지배층의 향락과 퇴폐, 군사교육장이 된 캠퍼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 촉구, 자유민주주의의 대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진걸의 선언문과 겹치는 개념이 많으나 문장은 훨씬 정련되었다. 모두 독서회나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통하여 체득한 지식을 실천하고자 한다. 이진걸과 신재식의 선언문이 주의 주장이 많고 학구적인 경향이 강하다면 정광민의 선언문은 학우들에게 말 건네는 형식으로 대중의 정동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세 가지 선언문의 첫 문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학원 내의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한다. 비민주적 학칙의 민주적 학칙으로의 개정과 학원 언론의 자율화와 학생회의 민주화와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어용교수 학자를 반대하며 학원 당국의 민주행정 방향으로서의 성의 있는 노력을 요망한다. 우리는 언론 인권 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 (이진걸의 <민주선언문>)

한민족 반만년 역사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처절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반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 반봉건동학혁명과 반식민 3.1 독립운동 및 무장독립 투쟁에 이어 저 찬란하던 반독재 4월의 학생혁명을 타고 흐르는 한민족의 위대하고도 피로 응어리진 자유평등의 민주주의 정신을 폭력과 기만으로 압살하려는 1961년도 이제 그 막차를 탔음을 우리의 견딜 수 없는 분노가 포효로써 증명한다. (신재식의 <민주투쟁선언문>)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정광민의 <선언문>)

이처럼 세 선언문은 어법과 태도의 차이가 있다. 그 내용의 유사함은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정광민의 선언문은 청년학도의 할 일, 독점자본과 서민 경제의 피폐함, 분배의 불균등과 서민의 노예적 삶, 부도덕한 정권과 아첨하는 권력 하의 문화적 낙후, 유신헌법 체제의 정치적 야욕, 독재에 대한 청년학도의 이성적 결단 요청,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진리와 자유의 봉기 촉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진걸과 신재식과 정광민은 동일하게 유신체제의 철폐를 요구한다. 이진걸과 신재식은 학원 민주화를 거론하나 정광민은 이를 부수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독점자본과 종속 경제로 인한 서민 경제의 피폐함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신재식이 후반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경향을 드러내었다면 이진걸은 유신헌법 세력의 퇴진이 통일의 길임을 내세운다. 정광민은 서민 경제의 낙후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분배 정의를 외치면서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촉구한다. 어떤 의미에서 민중적 현실에 대한 뚜렷한 지향을 제시한다. 어느 정도 세 사람의 이념적 낙차가 느껴지는 대목이며, 80년대에 나타나는 이념적 분화의 맹아로도 볼 수 있다. 이진걸이 민족문제를 놓치지 않았다면 신재식은 자유주의를 견지한다. 정광민은 다분히 민중해방이라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광민의 선언은 단순하게 학내 시위만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향후 전개될 민중 투쟁을 예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마무리 문단과 더불어 폐정 개혁안 일곱 가지를 제출하고 있다.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폐정개혁안> 1. 유신헌법 철폐 2. 안정성장경제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사찰 중지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 집회 결사의 완전한 자유와 보장 6.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7. 전국민에 대한 정치적 보복 중단

모든 효원인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이처럼 정광민의 선언문은 구체성과 진정성, 열정과 호소력을 담보하고 있다. 하루 저녁 우발적으로 쓴 글이 아니다. 많은 시간 동안 학습하고 고민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15일에 있었던 이진걸과 신재식의 불발 시위나 이들의 선언문은 단지 참조 사항이었을 뿐이다. 물론 이진걸 등이 정광민에게 동기와 용기를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이 정광민의 존재론적 결단을 감하지 못한다. 정광민은 전략과 전술 면에서 탁월하였다. 같은 학과 같은 학년 학우들의 정동에 호소함으로써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절반에 가까운 재학생을 운동장으로 학교 밖으로 결집하였다. 마침내 시내에서 민중과 함께 봉기함으로써 혁명의 전야를 연출하였다. 그의 선언문은 그의 열정과 의지, 시위의 방향과 목표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혁명 촉매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가 있어서 저항에 눈뜨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가능했다. 자발적 복종 상태의 우울증을 이겨내고 서로 이끌려 수행한 학내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이라면 도심 봉기의 주체는 학생을 포함한 민중이었다.

4. 그해 10월과 거리의 사상

이진걸과 신재식과 정광민 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광민은 『시월의 노래―10.16 부마항쟁 이야기』를 썼다. 이에 앞서 그는 장편소설 『부마항쟁 그후』(시월의 책, 2016)를 발간한 바 있다. 모두 기억을 바로잡자는 의도를 지니는데 후자가 사실에 허구를 가미하여 우회하였다면 전자는 고백적이고 직설적이다. 학생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1979년 10월 당시에 조직적이고 목적 의식적인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는 적어도 1980년 5월의 ‘참혹한 패배’를 겪은 뒤에 가능하였다. (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참조) 이러한 점에서 1979년 10월의 부산대 시위를 80년대적 시각으로 소급하여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외부의 관점으로 회수하는 서술도 문제가 있다. 부산대 시위를 학교 밖의 민주화 운동의 종속변수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광민이 사실을 찾아 싸움에 나선 일에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부와 외부에서 이를 달리 해석하고 서술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다. 달리 보면 이러한 일은 인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행위자의 기획과 수행의 성과를 평가하는 일과 연관된다. 정광민이 『시월의 노래』에서 말하는 온당한 지적처럼 사실의 왜곡이 없어야 하겠다.

1979년 10월 민중항쟁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16일 부산대에서 시작하여 거제리까지 나아간 학생 시위이다. 다른 하나는 16일 오후부터 17일 밤에 걸쳐 시내에서 전개된 민중항쟁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학생+민중의 항쟁에 시민이 호응하는 자연발생적인 연대가 형성되었다. 민중의 소외감과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의 불만,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학생들의 갈망이 집합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일부는 폭동을 생각하였고 일부는 비폭력 저항을 생각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물과 음식을 공급하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역할을 분담했다고 생각한다. 도시 주변부 빈민과 노동자, 소상인, 소외 여성, 학생들은 다른 계급적 이해와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맞서는 정동을 연출하였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독점자본과 독재체제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발달과 이에 연동한 대중의 억압된 욕망의 분출이 아닐까?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로 파출소, 경찰서, 방송국 등이 공격을 받았다. 파괴적 폭력이 단지 적대와 이념의 소산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미 민중은 소유와 소비의 욕망을 품고서 다른 세상을 갈망하는 무의식을 지녔다. 텔레비전의 시대를 맞아 일상생활에서 소비 욕망은 커졌다. 대중 스타가 등장하고 소비 광고도 많아졌다. 민중 봉기에 이러한 욕망과 해방의 문제―‘박정희 모더니즘’(권보드레 외, 『박정희 모더니즘』, 천년의상상, 2015. 참조)가 개입하였으리라고 믿는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레닌 등은 우리가 이 일을 해내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가? 민중 혁명은 늘 엘리트 혁명가의 일로 축소되었다. 우리가 1979년 10월의 거리를 기억하는 일도 이와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시위대를 향하여 박수를 보내고 한 그릇의 물을 떠주거나 빵과 우유를 건네던 시민들의 눈빛, 서로 다른 냄새를 풍기며 엉켜 독재 타도를 외치던 사람들이 맞잡은 손의 뜨거움도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김원은 10월의 항쟁에서 잊혀진 유령들이 있다고 한다.(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 2011. 참조) 도시하층민, 구두닦이, 깡패, 술집 여급, 창녀, 철가방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해 10월은 캠퍼스보다 거리가 중요하다. 그 거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기동대와 맞선 도로와 달아나 숨던 골목길이 있다. 또 하나의 유령이 있다면 그때의 거리와 골목이 아닌가 한다. 사람과 더불어 장소와 공간은 뗄 수 없는 역사이다. 16일 오후부터 전개된 ‘도시게릴라식 시위’(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 2011)가 가능했던 까닭은 남포동, 부평동, 동광동의 도심이 지닌 미로와 같은 골목에 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시민과 학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공간이 오늘날 원도심이라 부르는 공간이다. 시위를 주동하고 항쟁을 전개한 사람들의 기억을 제대로 불러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면, 항쟁의 현장을 기억하는 일도 요긴하다. 그해 10월의 거리가 없었다면 과연 잡다한 민중의 집합이 가능했을까? 10월 부산의 민중항쟁을 ‘거리의 사상’으로 ‘공간의 운동’으로 재인식할 때이다. 그럴 때 21세기에 필요한 상호텍스트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출처: <다시시월 1979>, 산지니,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