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수의가 될 때 까지 반정부세력의 급격한 성장을 가져오게 했고 민중들로 하여금 분노의 철학을 제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도 반유신 운동의 민중적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대학은 4.19 이후 제 2 의 레지스땅스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학원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캠퍼스는 온통 사복형사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철통같은 감시망 속에서 대학은 위축되고 학생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교정을 뒤흔드는 반유신의 함성, 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페퍼포그, 이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어 대학은 유신의 도도한 탁류 위로 표류되고 있었다. 부산대학교도 어김없이 반유신 대열의 표효하는 사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교수들의 강의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 속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고 학생들 눈엔 교수들이 비굴한 지식인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부대신문 <효원춘추>난에 "노을진 강의실에 서서"란 제목의 짤막한 수필을 실어 울적한 심회를 달래고 있었다.그때가 1979 년 10 월 8 일이었으니까 10.16 이 일어나기 전 꼭 여드레 앞이었다. 필자는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심경의 일단을 토로했다.
"높고 아득하게 쌓아 올린 일흔 아홉 개의 계단 위에서 님의 하늘거리는 옷자락은 핏빛 가을하늘을 가리고 말이 없다. 내가 소망하던 손수건만한 자유로운 영토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학창 시대가 오늘 이 해저문 강의실에 반사되면서 정오의 강의실을 지키고 있던 천 개의 눈동자를 생각나게 한다. 인류사의 그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여간 위대한 정치가, 철인, 예술가, 과학자들이 모두 이 작고 소박한 강의실을 통해 배출되어 갔다. 드골의 영광도 마치니의 민족도 모두 젊은 날의 외로운 책상 앞에서 환상한 것들이다. 나는 내일 이른 새벽 강의실 문을 활짝 열고 달려올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생각하며 어둠 속에 무수한 장미꽃을 던진다. 젊은이여, 우리 성큼 다가서서 새로운 계절의 노래를 부르며 제 80 계단의 序詩를 쓰자."
나는 이 글을 쓰던 날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눈을 감으면 강의실에서 울분을 터뜨리던 학생들의 얼굴이 무수하게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그중 특히 내게 강열한 인상을 준 사람들은 상과대학 경제학과 2학년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을 통하여 시대에 대한 울분과 항변을 토하고 있었다. 경제학과 학생들의 수업에 들어가 보면 언제나 어떤 조국애의 엄숙함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고 학생들의 얼굴엔 희망적인 정열 같은 것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느 날, 학생들은 "선생님은 데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그때 "지금 당장 희생이 되더라도 여한이 없다면 데모를 하라. 그러면 나도 그 뒤를 따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만 두어라"고 답변했다. 또 어떤 때는 학생들은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묻곤 했다. 그때 나는 "한국적 민주주의란 용어 자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그러나 다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다르고 학생들이 생각하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다를 뿐이다"라고 응답했다. 이렇듯 강의실은 지적 호기심과 조국을 위한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 캠퍼스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바로 이 경제학과 2 학년 학생들이 10.16 부마항쟁의 혁명적 씨앗을 뿌린 새 역사 창조의 선구자들이었다.
1979 년 10월 16일 오전 10시 필자는 경제학과 2 학년에 수업이 있어서 강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 일인지 30 여명의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도서관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들은 도서관 앞으로 갔다. 그때는 마침 중간시험 준비로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경제학과 학생들은 그곳에서 200 여명의 학생들을 모았다.학생들은 연좌하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우리의 소원은 자유"라는 개사곡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노래는 삽시간에 도서관을 저항의 불길로 타오르게 했다. 잔인한 4 월의 봄빛 사이로 학생들 의 노랫소리는 커다란 함성이 되어 메아리쳐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부마항쟁의 거대한 불길로 타오를 줄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이 되려고 하면 언제나 돌발적인 변수가 생기는 법이다.
11시쯤 되었을까 경찰들이 교문을 박차고 학교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었다.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았다. 그들이 쏜 최루탄은 본관 유리창에까지 와 닿고 있었다.
경찰의 캠퍼스 진입과 최루탄의 발사는 일시에 학생들을 모으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어 수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숲 속에서, 도서관에서,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밀물같이 몰려들었다.
2 천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을 장악하고 운동장을 끝없이 돌았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굳게 손을 잡고, 책가방을 들고 목을 끌어안고 손에 손을 잡고 대열은 끝없이 운동장을 선회했다.
희대의 반란이었다. 이제 지도자도 필요없다. 누군가가 절규하면 그의 뒤를 따른다. 4.19 이후 6.3 사태를 비롯한 수많은 데모가 있었지만 이 데모가 박 정권의 운명에 결정타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학생들은 사대부고의 담을 넘어뜨리고 혹은 구정문을 박차고 가투에 나서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 뛰어서 가는 사람, 광복동 중심가를 향한 대열은 그렇게 출발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나갈 때 경찰들의 저지선을 뚫기 위해 상점 앞에 쌓아둔 빈 맥주병으로 위협했고 그 엄청난 데모 군중의 숫자에 경찰들은 한껏 위축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경 속엔 본교 학생들까지 끼어 있어 악수를 하는 헤프닝도 연출되었다. 그동안 사실상 부산대학은 데모 안하는 학교로 비난을 받아왔다. 루머에 따르면 서울 소재의 대학교 학생들이 편지에 가위와 성기를 그려 놓고 가위를 부산대학 남학생들의 그것을 짤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라. 지금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성난 얼굴로 뛰고 있지 않는가. 땀에 젖은 얼굴로 중심가를 향해 뛰고 있다.
여기서 잠시 왜 그날 부산의 경찰들은 이 데모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부산의 경찰들은 근간에 데모를 막아본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데모 진압에 매우 미숙했던 것 같다. 만약 그 날, 경찰이 학교 내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10.16 은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찰들은 학생들이 버스에 타면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경찰은 다각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10.16 은 남포동과 광복동을 중심으로 한 중심가에서 민족의 함성으로 시민과 어우러질 수 있었다.
학생들을 놓쳐버린 캠퍼스엔 한낮의 야릇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이크에선 학생들을 자제시키려는 총장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교수들은 황급히 시습관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교수들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이 없었다.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교수들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날의 사태에 대해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드디어 박기채 총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노총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 역사 이래 청년들은 늘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해 왔습니다. 저와 교수님 여러분들은 학생지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오늘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 했기 때문에 사태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총장은 간단한 말로 교수들에게 사태 수습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 총장의 무거운 말은 그가 단적으로 데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을 나무라는 말도, 교수들을 괴롭히는 말도 그는 결코 하지 않았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행한 짧은 연설이었지만 총장의 심경이 그대로 노출된 기억할만한 연 설이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캠퍼스엔 어둡사리가 끼이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학교 차로 광복동 현장으로 가게 돼 있었다.
마침 그때 박찬현 문교장관이 허겁지겁 부산대학을 찾아왔다. 박장관은 교수들을 효원회관에 모아놓고 "부산대학교 교수들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오래 된 누런 노트로 강의를 하고 있다 .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교수 여러분들의 책임이다. 어용이 무엇이 두려운가, 자랑스러운 어용이 되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러나 연설 도중 그의 비서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하얀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받는 순간 박 장관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쪽지의 내용인 즉 창선동 파출소가 학생들에 의해 불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채 연설도 끝마치지 못하고 박 장관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박 장관은 꽁지빠진 닭처럼 광복동으로 달려가기에 바빴다.
이후 우리는 학교 버스에 몸을 싣고 분노가 깔린 거리의 어둠을 헤치고 광복동으로 갔다. 벌써 거기에는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합세해 군중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사실상 학생들을 붙잡고 말할 기력을 잃고 있었다. 사태 수습을 위한 대외용으로 교수들은 광복동으로 갔지만 내심 교수들도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경찰과 학생들이 밀고 밀리고 골목과 골목에선 학생들의 애국가 소리가 밤하늘을 휘덮고 있었다. 건물마다 2층과 3층 그리고 4층, 옥상 등에선 고개를 창밖으로 내민 시민들의 박수 소리가 시위 학생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경찰들이 따라오면 시위 학생들은 군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구경꾼처럼 가장, 경찰의 저지망을 피했다. 손수레를 끌고 가는 막소주와 김밥 장수는 학생들에게 김밥과 소주를 주며 격려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도 함께 시위를 했다. 먹자골목에서의 일이었다.
유신철폐의 구호는 한국에서도 남쪽 끝, 항도 부산의 밤하늘을 찢었다. 닫힌 셔터를 한 학생이 두들겨 신호를 하면 어디선가 흩어졌던 학생들이 골목, 골목에서 나와 일시에 수십 명씩 모이고 했다.
경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경찰이 추적해 오면 학생들은 다방으로 술집으로 혹은 건물의 지하로 숨어버렸다. 이리하여 데모는 자정이 가깝도록 진행했다. 교수들은 오후 여덟시 경에 곧 학교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필자는 10.16 데모가 4.19 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기 위해 끝까지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여기 계시면 다친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숨겨주곤 했다.
지형지물로 보아 남포백화점 앞이 학생들 집결지로서는 적격이었다.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연히 한 학생이 나타나 그 앞에 세워둔 경찰 백차에 화염병을 던진다. 불길은 치솟고 백차는 불타기 시작한다. 불타는 경찰 백차의 불기둥 속에서 박 정권의 불길한 징조를 읽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또 스크럼을 짜고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다가 때로 부영극장으로 숨어버리기도 했다. 다방 아가씨와 술집의 호스티스들까지 나와 박수 치고 고함 지르고 세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그 무렵 군대는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경찰 병력으로선 이미 진압에 한계를 들어냈기 때문에 시위 진압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경찰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있었고 그냥 방관자처럼 물끄러미 서있기만 했다.
남포동과 광복동, 그리고 국제시장을 꽉 메운 성난 군중들은 쉴 새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것은 마치 6 월 항쟁때의 서면로타리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6 월 항쟁도 이미 10.16 부마사태에 잉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정이 가까워 왔다. 허겁지겁 쫓기며 돌아오는 길에 무장군인들과 조우했다.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중앙동 육교 위로 뛰어올라 갔다. 군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총을 휘두르며 뒤따라 왔다. 이렇게 하여 겨우 영주동 터널을 건넜다. 거기서 조금 나와 차를 타고 귀가했다.
이튿날 학교에선 거듭거듭 교수회의가 개최되고 운동장엔 군대들이 캠프를 치고 학교는 온 통 군인들 세상이 되었다. 이튿날 새벽 우리 교수들은 시청 앞으로 갔다. 버스 정류소에 서서 버스에 오르는 학생을 귀가시켰다. 그리고 대학 당국에선 가정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 방문은 가지 않았다. 다만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했다. 어디서 제시되었는지 모르지만 데모 때 찍은 사진을 내어 놓고 자기 학생들을 골라 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10.16 부마항쟁,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2.28 에서 3.15 까지 15 일, 3.15에서 4.19 까지 한달 남짓, 그 짧은 기간에 역사가 바뀐 사실을 생각하면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따라서 역사적 경험은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열흘 후 궁정동 사태로 유신체제는 붕괴됐다.이리하여 부산대학교가 중심이 된 10.16 사태는 10.26 궁정동 사태로 끝을 맺었다.
80 년의 새봄이 찾아왔다.10.16 부마사태의 혁명적 기운이 아직도 부산 시민의 가슴에서 그 나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산은 역사의 도시로 변했다. 민족혼의 용광로가 된 것이다. 민족 민주 운동의 메카, 그 곳이 바로 부산인 것이다.
 <생전의 이대우 교수님> * 고 이대우 교수는 대구 2.28 민주운동의 주역이셨다. 2.28의 주역이 10.16의 현장을 목격하고 증언을 남기셨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증언이다.
출처: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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